[미국 조선업 쇠퇴사 3부] ‘존스법’의 덫과 한미 동맹, 재건의 서막을 열다

지정학적 위기와 한미 동맹, ‘재건의 설계도’를 그리다

1980년대, 정부 보조금 폐지라는 충격 요법으로 상선 분야가 괴멸한 이후, 미국 조선업은 오직 미 해군이라는 단일 고객에게만 의존하는 기형적인 구조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소련의 붕괴와 함께 냉전이 종식되자, 그 유일한 동아줄마저 흔들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거대한 적이 사라진 시대, ‘평화 배당(Peace Dividend)’이라는 이름 아래 국방 예산은 감축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고, 이는 곧 함정 발주량의 감소로 이어졌다.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미국 조선업은 ‘존스법(Jones Act)’이라는 100년 된 법의 울타리 안으로 더욱 깊숙이 숨어들었다. 이 법은 마지막 남은 산업 기반을 지켜주는 보호막이었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퇴보하게 만든 ‘황금 새장’이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미국 조선업은 이 새장 속에서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린 채 길고 긴 정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21세기 새로운 지정학적 위기는, 이 갇혀버린 거인에게 역설적으로 재건을 향한 마지막 기회의 문을 열어주고 있다.

냉전 종식과 평화 배당, 마지막 고객마저 흔들리다

1991년 소련의 붕괴는 전 세계에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를 알리는 낭보였지만, 미국의 군수산업계에는 재앙의 서곡과도 같았다. 수십 년간 지속된 군비 경쟁의 명분이 사라지자, 미 의회와 행정부는 국방 예산을 대폭 삭감하여 그 재원을 사회 복지와 경제 발전에 투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러한 ‘평화 배당’의 흐름 속에서, ‘600척 함대’를 향해 달려가던 미 해군의 증강 계획은 급제동이 걸렸다. 신규 함정 발주 계획은 줄줄이 취소되거나 무기한 연기되었고, 기존 함대의 유지보수 예산마저 축소되었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이는 상선 시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직 미 해군만을 바라보던 대형 조선소들에게는 직격탄이었다. 유일한 고객의 주문량이 급감하자, 조선소들은 생존을 위한 처절한 구조조정에 내몰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개에 달했던 미국의 대형 민간 조선소들은 1990년대를 거치며 인수합병을 통해 극소수로 재편되었다. 결국 오늘날 미국의 대형 함정 건조는 사실상 동부의 ‘헌팅턴 잉걸스 인더스트리(HII)’와 ‘제너럴 다이내믹스(GD)’라는 두 거대 방산 기업이 과점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HII 산하의 뉴포트 뉴스 조선소는 항공모함과 핵잠수함을, GD 산하의 일렉트릭 보트와 배스 철공소는 잠수함과 구축함을 나눠 맡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일자리가 또다시 사라졌고, 국가 전체의 조선 역량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1980년대가 상선 분야의 붕괴였다면, 1990년대는 간신히 버티던 군함 분야마저 뿌리부터 흔들리며 미국 조선업 전체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든 시기였다.

보호무역의 역설, ‘존스법’이라는 황금 새장

군함 발주마저 불안정해진 상황에서, 미국 조선업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명맥이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20년에 제정된 ‘존스법(Jones Act)’이라는 강력한 보호무역 장벽이 있었다. 이 법은 미국 내 항구 간의 모든 상업적 해상 운송은 반드시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며, 미국 선적으로 등록된, 미국인 선원이 타는 선박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 이는 해외의 저가 선박들이 미국 국내 연안 운송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수준의 연안무역보호법(Cabotage Law)이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존스법은 분명 미국에 남은 소수의 상선 조선소들에게는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이 법이 없었다면, 이들마저도 이미 오래전에 문을 닫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강력한 보호막은 지난 수십 년간 미국 조선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산업 전체를 퇴보시킨 ‘황금 새장’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외부와의 경쟁이 완전히 차단된 독점적 환경 속에서, 미국 조선소들은 기술을 혁신하고 생산성을 높여 원가를 절감해야 할 절박한 동기를 상실했다. 그 결과, 존스법 기준을 충족하는 미국산 선박의 가격은 국제 시세보다 평균 4~5배나 비싸졌고, 납기일 지연과 품질 문제도 고질병이 되었다. 이러한 고비용·저효율 구조는 조선업을 넘어 미국 경제 전체에 악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미국 본토에서 생산된 천연가스(LNG)를 에너지난을 겪는 푸에르토리코나 뉴잉글랜드 지역으로 보내려면 존스법 선박을 써야 하는데, 미국에는 LNG 운반선 건조 기술과 시설이 없어 외국에서 수입하는 것보다 운송비가 훨씬 비싸지는 기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국 조선업이 ‘황금 새장’ 안에서 안주하며 퇴보하는 동안, 바다 건너 아시아에서는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국은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에 올랐고, 중국은 막대한 정부 지원과 인력을 바탕으로 세계 1위의 건조량을 자랑하는 ‘조선 굴기’에 성공했다. 21세기 세계 조선 시장은 이들 아시아 국가들이 완전히 장악했고,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미국 조선업은 존재감 없는 변방으로 밀려나 갇혀버린 거인의 신세가 되었다.

지정학적 위기와 한미 동맹, ‘재건의 설계도’를 그리다

길고 어두웠던 정체의 터널에 최근 한 줄기 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역설적으로 21세기 새로운 지정학적 위기, 즉 중국의 부상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최대의 해군력과 상선대를 동시에 구축하며 해양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의 야심은, 미국 조야에 자국 조선업의 붕괴가 단순한 산업 문제를 넘어 심각한 ‘국가 안보의 공백’이라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유사시 필요한 선박을 자체적으로 건조하고 수리할 능력이 없다면, 전쟁 수행 능력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로 인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 조선업의 ‘재건’이 진지한 정책적 의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쇠락한 산업 기반과 사라진 숙련 노동자, 낙후된 기술력을 미국 혼자만의 힘으로 단기간에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세계 최고의 조선 기술력을 보유한 동맹국, 대한민국과의 협력이 가장 현실적이고 강력한 대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한국의 조선 기술과 생산 관리 노하우를 미국에 도입하여, 노후화된 미국 조선소를 현대화하고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구체적인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출처: 현대중공업 홈페이지]

이는 단순한 기술 이전을 넘어, 한미 동맹이 군사·안보 분야를 넘어 첨단 산업 분야로 확장되는 ‘전략적 산업 협력’의 성격을 띤다. 예를 들어, HD현대중공업이나 한화오션과 같은 한국의 세계적인 조선 기업들이 필라델피아 조선소 등 미국의 상선 조선소에 지분을 투자하거나 합작 법인을 설립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이를 통해 한국은 로봇 자동화, 디지털 트윈(Digital Twin), 스마트 야드(Smart Yard)와 같은 최첨단 생산 기술과 효율적인 관리 시스템을 미국 현지에 이식하고, 미국은 이를 바탕으로 차세대 친환경 선박이나 해상풍력 설치선, 그리고 군함의 유지보수(MRO) 역량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DSEI 한화 전시관 출처: 한화오션 홈페이지]

이러한 협력은 양국 모두에게 ‘윈윈(Win-Win)’이 될 수 있다. 미국은 동맹국의 도움을 받아 안보의 핵심축인 조선업을 재건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다. 한국은 자국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바탕으로, 진입 장벽이 높았던 미국 본토의 방산 및 존스법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원조로 재건의 기틀을 닦았던 국가들이 결국 미국 조선업의 경쟁자가 되었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제는 그 경쟁자 중 가장 성공적인 동맹 파트너인 한국이 역으로 미국 조선업 재건의 설계도를 그려주는 역사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은 멀지만, 한미 동맹이라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미국 조선업은 마침내 길었던 침체의 터널을 지나 재건의 서막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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