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스퀘어 아치: 그리니치 빌리지의 심장, 뉴욕의 역사를 품다

뉴욕의 역사 그리고 성격을 보여주는 상징

뉴욕 맨해튼의 격자형 도로망은 14번가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부터 그 엄격한 규칙을 잃고 자유로운 미로로 변모한다. 바로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영혼의 동네가 시작되는 관문에는, 마치 파리의 개선문처럼, 그러나 훨씬 더 인간적인 규모로 방문객을 맞이하는 백색의 대리석 아치가 서 있다. 워싱턴 스퀘어 아치(Washington Square Arch). 5번가의 남쪽 끝이자, 워싱턴 스퀘어 파크의 북쪽 입구를 당당히 지키고 있는 이 건축물은 단순히 미국 초대 대통령을 기리는 기념비를 넘어선다. 그것은 지난 130여 년간 뉴욕이라는 도시가 겪어온 모든 영광과 상처, 예술적 열정과 사회적 갈등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함께 늙어온 역사의 증인이자, 이 도시의 심장 그 자체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 속 배경에서 밥 딜런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무대로,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해방구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함성의 광장으로. 워싱턴 스퀘어 아치는 어떻게 하나의 건축물이 아닌, 뉴욕의 살아있는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본 기사는 아치의 대리석 결 하나하나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을 따라, 그 탄생과 상징, 그리고 문화적 변천의 대서사시를 추적한다.

조지 워싱턴, 그리고 뉴욕의 자부심이 빚어낸 백색의 관문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워싱턴 스퀘어 아치의 이야기는 19세기 말, ‘황금 시대(Gilded Age)’의 정점에 있던 뉴욕의 자부심과 열망에서 시작된다. 1889년, 미국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취임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의 저명한 사업가이자 자선가였던 윌리엄 라이랜더 스튜어트(William Rhinelander Stewart)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할 상징적인 건축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고 기금을 모아, 당대 최고의 건축가 중 한 명이었던 스탠포드 화이트(Stanford White)에게 설계를 의뢰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나무와 석고로 만들어진 거대한 임시 아치였다. 워싱ton 스퀘어 파크 북단, 5번가가 끝나는 지점에 세워진 이 임시 아치는 100주년 기념 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가 되었고, 뉴욕 시민들의 폭발적인 찬사를 받았다. 일시적인 구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웅장함은 시민들의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축제가 끝난 뒤 아치가 철거될 운명에 처하자, 이 아름다운 관문을 영원히 남겨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시민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스튜어트는 다시 한번 영구적인 기념물 건립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민간 주도의 기금 모금 캠페인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다시 한번 스탠포드 화이트의 손에 영구 아치의 설계가 맡겨졌다. 화이트는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에서 영감을 얻어, 고전적이면서도 미국의 이상을 담아낼 수 있는 위엄 있는 디자인을 고안했다. 재료로는 뉴욕주 터커호(Tuckahoe)에서 채석된, 눈부시게 희고 빛나는 최상급 대리석이 선택되었다. 이는 유럽의 유산을 계승하되, 미국의 자원으로 미국의 영웅을 기린다는 당대 뉴요커들의 자부심이 담긴 선택이었다.

1890년 5월 30일, 아치의 초석이 놓였고 2년여의 공사 끝에 1892년, 마침내 77피트(약 23.5미터) 높이의 백색 대리석 아치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1895년의 공식 헌정식에서, 이 아치는 단순히 워싱턴 개인을 기리는 것을 넘어, 미국이라는 공화국의 건국 이념과 민주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영원한 관문으로 뉴욕 시민들에게 봉헌되었다. 그것은 19세기를 마감하며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던 뉴욕이 스스로의 위상과 자부심을 담아 세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었다.

전쟁과 평화: 아치에 새겨진 미국의 이상

워싱턴 스퀘어 아치는 그 자체로 한 권의 조각 교과서이자,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담은 상징의 집합체다. 아치의 진정한 의미는 그 구조를 장식하고 있는 정교한 조각상과 문구들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 특히 5번가를 마주 보는 북쪽 면에 자리한 두 개의 거대한 조각상은, 아치가 완공된 지 약 20년 뒤인 1910년대에 추가되어 아치의 상징적 의미를 극대화했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동쪽(오른쪽)에 자리한 조각상은 ‘전쟁 속의 워싱턴(Washington at War)’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다. 조각가 허몬 앳킨스 맥닐의 1916년 작품으로, 독립 전쟁 당시 대륙군 총사령관이었던 워싱턴의 모습을 묘사했다. 굳건한 표정의 워싱턴은 군복을 입고 칼 위에 손을 얹고 있으며, 그의 양옆에는 각각 ‘명예(Fame)’와 ‘용기(Valor)’를 상징하는 우의적인 인물상이 그를 보좌한다. 이는 국가의 독립을 위해 전쟁이라는 험난한 길을 걸어야 했던 건국의 아픔과 용기를 상징한다.

서쪽(왼쪽)의 조각상은 ‘평화 속의 워싱턴(Washington at Peace)’이다. 유명 조각가 알렉산더 칼더의 아버지인 알렉산더 스털링 칼더가 1918년에 완성한 이 작품은, 전쟁 영웅이 아닌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워싱턴을 그리고 있다. 민간인 복장을 한 워싱턴은 책에 손을 얹고 있으며, 그의 옆에는 ‘지혜(Wisdom)’와 ‘정의(Justice)’를 상징하는 인물상이 함께하고 있다. 이는 전쟁을 통해 얻어낸 독립을 바탕으로, 지혜와 정의라는 민주적 가치 위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미국의 이상을 표현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두 모습의 워싱턴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아치는 미국이 무력(전쟁)을 통해 자유를 쟁취하고, 그 자유를 이성(평화)을 통해 지켜나가는 국가임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아치의 남쪽 면, 즉 공원을 바라보는 면 상단에는 워싱턴이 헌법 제정 회의에서 남긴 연설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Let us raise a standard to which the wise and the honest can repair. The event is in the hand of God.” (현명하고 정직한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기준을 세웁시다. 그 결과는 신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문구는 아치가 단순한 승전 기념비가 아니라, 미래 세대가 따라야 할 도덕적, 정치적 기준이자 원칙을 제시하는 등대임을 암시한다. 아치를 지나는 모든 이들에게, 이 나라는 어떤 가치 위에 세워졌는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하는 엄숙한 메시지인 셈이다.

보헤미안의 놀이터에서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아치가 세워진 그리니치 빌리지는 20세기 초부터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예술가, 작가, 급진적인 사상가들이 모여드는 보헤미아니즘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치는 이 자유로운 영혼들의 놀이터이자,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해프닝의 무대가 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1917년 1월에 일어난 ‘워싱턴 스퀘어 자유 독립 공화국’ 선포 사건이다. 화가 마르셀 뒤샹과 존 슬론 등 6명의 예술가들은 밤중에 몰래 아치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로 올라가, 술을 마시고 랜턴을 흔들며 ‘그리니치 빌리지가 뉴욕으로부터 독립했음’을 선언하는 장난기 가득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일화는 워싱턴 스퀘어 아치가 더 이상 권위적인 기념물이 아닌, 예술적 저항과 자유로운 상상력의 상징으로 변모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시간이 흘러 1960년대, 아치 아래 광장은 포크 음악 부흥의 성지가 되었다. 밥 딜런, 조니 미첼, 존 바에즈와 같은 젊은 음악가들이 아치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했고, 이들의 음악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아치는 기성세대가 세운 ‘전쟁 영웅’의 기념비였지만, 이제 그들의 자녀 세대는 바로 그 아치 아래에서 평화를 노래하며 반전 시위를 벌이는 아이러니한 역사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후 워싱턴 스퀘어 아치와 그 아래 광장은 뉴욕의 모든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분출되는 민주주의의 광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다. 여성 인권 운동, 성 소수자 인권 운동(프라이드 퍼레이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에 이르기까지, 변화를 갈망하는 뉴요커들의 함성은 언제나 아치를 중심으로 울려 퍼졌다. 아치는 더 이상 과거의 영웅을 기리는 박제된 기념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미래를 향한 열망을 증폭시키는 살아있는 확성기이자, 뉴욕의 민주주의가 숨 쉬는 가장 중요한 공공 광장으로 거듭났다.

시간의 흔적: 대리석에 남은 130년의 상처와 치유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오늘날 워싱턴 스퀘어 아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표면의 색이 균일하지 않고 얼룩덜룩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오랜 세월의 때가 묻은 것처럼 보이는 이 색상의 차이는, 아치가 겪어온 130여 년의 물리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상처이자 치유의 기록이다.

아치의 색이 다른 이유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첫째, 앞서 언급했듯 아치 본체는 터커호 대리석으로, 나중에 추가된 두 개의 워싱턴 조각상은 도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재료 자체가 다르다. 이 두 종류의 대리석은 시간이 지나면서 각기 다른 속도와 색감으로 풍화된다. 둘째,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손상과 복원의 역사 때문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뉴욕의 혹독한 날씨와 대기 오염, 산성비는 아치의 섬세한 대리석 표면을 끊임없이 부식시키고 침식시켰다.

특히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진행된 대대적인 복원 프로젝트는 현재 아치의 모습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전문가들은 부서지거나 없어진 장식(특히 아치 천장의 95개 장미 문양 중 45개)을 원래의 색과 질감에 맞춰 제작한 ‘캐스트 콘크리트(cast concrete)’와 같은 현대적인 재료로 교체하거나 보강했다. 처음 복원했을 당시에는 최대한 이질감이 없도록 색을 맞추었지만, 130년 된 오리지널 대리석과 20년 남짓 된 콘크리트 복원재는 세월의 흐름에 다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오래된 대리석은 수많은 겨울과 여름을 나며 자연스럽게 변색된 고유의 파티나(patina)를 형성한 반면, 새로 추가된 부분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변색된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결국 아치의 얼룩덜룩한 표면은 실패한 복원의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이 기념물을 보존하기 위한 뉴욕시의 끊임없는 노력을 보여주는 훈장과도 같다. 그것은 처음 아치를 세웠던 19세기 사람들의 자부심, 그것을 훼손했던 20세기의 공해,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려는 21세기 사람들의 정성이 함께 새겨진, 살아있는 역사의 피부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워싱턴 스퀘어 아치는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다. 그것은 미국의 건국 이념을 담아 탄생하여, 보헤미안의 자유로운 영혼과 저항의 무대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들의 함성을 품었으며, 도시의 오염과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상처마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 뉴욕 그 자체다. 아치 아래를 지날 때, 우리는 단순히 아름다운 건축물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뉴욕이라는 도시의 가장 깊고 다채로운 영혼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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