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Kings” — 미국 민주주의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식

트럼프 시대 이후, 시민이 만들어낸 회복력의 기록

‘왕은 없다’—헌정의 원칙을 다시 외친 시민들

2025년 6월 14일, 미국 전역이 다시 한 번 거대한 인파로 뒤덮였다.
수백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와 외친 구호는 단순했다. “No Kings.”
그날은 미 육군 창설 250주년이자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생일이었다. 워싱턴 D.C.에서는 군사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서는 수많은 시민이 “이 나라는 왕이 아닌 국민의 것이다”라고 외쳤다.

“No Kings Movement”(노 킹스 운동)는 단순한 정권 반대 시위가 아니라, 민주주의 회복력(democratic resilience) 의 집단적 표현이었다.
시민들은 권력 집중과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며, 헌법이 규정한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원칙을 스스로 상기시켰다.
이날의 시위는 미국 50개 주, 약 2,000개 도시에서 동시에 열렸으며, 주최 측 추산 4백만에서 6백만 명이 참여했다.
이어 10월 18일에는 두 번째 전국 동시 시위가 열렸고, 그 규모는 7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보도도 나왔다.

[출처:https://www.nokings.org]

“No Thrones, No Crowns, No Kings.”
이 문구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미국 헌정 질서의 뿌리를 다시 되새기는 선언이었다.
미국 독립선언 이후 250년 동안, “군주 없는 공화국”이라는 정체성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노 킹스 운동은 그 초심을 시민 스스로의 목소리로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트럼프 시대의 그림자와 민주주의의 시험대

노 킹스 운동의 직접적 배경에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과 통치 방식이 있다.
2024년 대선 이후 트럼프는 다시 한 번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했고, 군사 퍼레이드와 이민 단속 강화, 언론 비판, 사법기관 압박 등의 행보는 “권위주의적 회귀”에 대한 우려를 자극했다.

특히 연방 정부의 권력이 지방 자치와 의회를 압도하고, 대통령이 ‘국가의 주권자’처럼 행동한다는 비판이 확산되었다.
이에 시민사회와 인권단체, 노동조합, 종교단체가 연합해 조직한 것이 바로 노 킹스 운동이다.
참여 단체에는 ACLU(미국시민자유연합), MoveOn, Indivisible, 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등 주요 진보 단체가 포함됐다.

운동의 상징성은 날짜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트럼프의 생일과 군사 행진이 겹친 그날, 시위대는 “민주주의는 군복을 입지 않는다”고 외쳤다.
이 구호는 트럼프 행정부가 보여준 군사적 상징의 정치화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었다.
결국 노 킹스 운동은 미국 사회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감지하고, 스스로 제동을 거는 자기 방어적 정치 행위였다.

[출처:https://www.nokings.org]

시민의 힘으로 작동한 민주주의 회복력

미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은 국가 제도의 구조적 안정성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 핵심은 시민 참여를 통한 자정 기능에 있다.
노 킹스 운동이 보여준 것은, 시민사회가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비공식적 제도’로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운동의 조직자들은 비폭력 원칙을 철저히 강조했다.
참가자들은 평화적 시위 교육을 받았고, 각 도시의 인권 변호사들이 긴급 체포 시 법적 지원 네트워크를 구성했다.
또한 SNS를 통해 허위정보와 선동을 차단하고, 지역별 조직망을 통해 자율적 질서를 유지했다.
이런 구조적 대응은 단순한 분노 표출이 아닌, 시민 민주주의(civic democracy) 의 성숙한 형태를 보여준 것이다.

이 운동의 의미는 정치적 효과를 넘어선다.
미국 사회가 여전히 제도와 시민의 균형 속에서 민주주의를 복원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시위가 있음에도 폭력 사태나 무질서가 거의 보고되지 않았고, 정부 또한 이를 강경 진압하지 않았다.
이는 2021년 의사당 난입 사태와는 정반대의 풍경이었다.
즉, 노 킹스 운동은 민주주의의 위기가 곧 폭력으로 치닫지 않고, 오히려 시민의 참여로 안정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대조적 복원 모델’이었다.

제도적 균형을 되찾는 미국 민주주의의 자가치유

노 킹스 운동은 단순한 사회운동이 아니라, 제도적 기능 회복의 신호탄이었다.
시민의 대규모 행동은 의회와 사법부, 언론이 다시 제 역할을 하도록 촉진했다.
하원의 권한 강화 논의, 대법원 독립성 보장법안, 언론자유 보호를 위한 연방 차원의 법안들이 다시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 민주주의의 “제도적 회복력(institutional resilience)” 을 확인시켜준다.
위기 상황에서 제도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어렵지만, 시민이 참여할 때 그 방어기제가 다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결국 노 킹스 운동은 헌법적 질서가 시민의 의지와 결합될 때 어떻게 다시 균형을 찾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한 정치학자는 이를 두고 “미국 민주주의의 면역체계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권위주의적 언행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사법·입법 체계는 헌정 절차를 유지했고, 언론과 시민은 그것을 지켜냈다.
그 결과 미국의 민주주의는 ‘후퇴’가 아니라 ‘복원’을 경험했다.

위기 속에서 진화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의 강점은 완벽한 제도에 있지 않다.
그 진짜 힘은 위기 이후 얼마나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을 복원할 수 있느냐에 있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회복력(Democratic Resilience)’이다.

[출처:https://www.nokings.org]

미국은 지난 100년간 여러 차례 민주주의의 시험대를 통과했다.
1930년대 대공황, 1960년대 인권운동, 1970년대 워터게이트, 2001년 9·11 테러, 2021년 의사당 난입 사건 등은 모두 체제의 균열을 드러냈다.
그러나 매번 제도는 복원되었고, 시민은 다시 공공의 장으로 돌아왔다.
노 킹스 운동은 이러한 회복력의 현대적 버전이다.

오늘날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분열과 불신 속에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제도를 재정비하고, 시민이 행동하며, 언론이 감시하고, 법이 통제하는 “자가치유(self-healing)”의 메커니즘이 살아 있다.
이 메커니즘이 바로 미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힘이다.

노 킹스 운동은 그 힘이 아직 유효함을 보여줬다.
왕을 거부하는 구호 속에는, 권력의 절대화를 막고 시민 주권을 지켜내려는 시대적 의지가 담겨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기 속에서 흔들리지만, 그 회복의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정의하고 있다.

결론: 민주주의는 끝나지 않는다

노 킹스 운동은 단순한 거리 시위가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가 위기 속에서도 스스로를 복원할 수 있음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그 운동이 입법이나 정책 변화를 즉각적으로 이끌지 못하더라도, 그 자체로 시민 주권의 재확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민주주의는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흔들리고, 위협받고, 때로는 붕괴의 가장자리에 선다.
하지만 매번 그 위기 속에서 시민은 다시 광장으로 나오고, 제도는 다시 작동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은 바로 그 반복 속에서 강해져 왔다.

“왕은 없다(No Kings)”는 구호는 미국의 헌정 원리를 넘어, 현대 민주주의 전체를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승리에 있지 않고, 회복에 있다.
그리고 그 회복의 주체는 언제나 제도도, 정당도 아닌 시민이다.

뉴욕앤뉴저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Previous Story

워싱턴 스퀘어 아치: 그리니치 빌리지의 심장, 뉴욕의 역사를 품다

Next Story

The Donut Pub — 뉴욕의 밤을 지키는 달콤한 불빛

Latest from Featured

추수감사절, 신화에서 성찰로

11월의 미국은 언제나 같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공항의 긴 줄, 도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자동차 행렬, 그리고 가족을 기다리는 식탁 위의 커다란 칠면조 한 마리. 매년 네 번째 목요일, 미국인들은 이 의식을 되풀이한다.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은…

Macy’s, 미국의 쇼윈도를 만든 이름

한 점포의 꿈이 제국이 되다 ― R.H. Macy의 시작과 뉴욕의 시대 1858년 뉴욕 맨해튼의 14번가, 그리 크지 않은 상점 하나가 문을 열었다. 창업자 로랜드 허시 메이시(Rowland Hussey Macy) 는 세탁업과 선원 생활,…

“작은 상자에서 시작된 거대한 경제”- POP MART

중국의 팝마트(POP MART International Group, 泡泡瑪特)는 단순한 장난감 제조업체가 아니다. 2010년 베이징에서 설립된 이 기업은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상자”라는 단순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10년 만에 글로벌 완구 산업의 중심에 올라섰다.…

[오피니언] 표현의 자유와 총기 규제

11월의 워싱턴, 의사당 앞 잔디밭에는 두 개의 깃발이 나란히 휘날린다.하나는 “Don’t Tread on Me”라 적힌 전통적 자유주의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Gun Rights are Human Rights(총기 소유는 인권이다)”라는 문구를 담은 깃발이다. 같은 공간에…

2025년 뉴욕에서 추수감사절, 알차게 준비하는 법

11월의 뉴욕은 특별한 향기로 가득하다. 메이플과 시나몬 냄새가 거리를 감싸고, 거리 곳곳의 창문에는 칠면조와 단풍잎 장식이 걸린다. 그리고 목요일 아침, 허드슨강 너머로 햇살이 번질 때,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바로…
Go to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