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술을 이야기할 때 막걸리는 늘 가장 먼저 언급되면서도, 가장 쉽게 설명되지 않는 존재다.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마셔본 경험이 있지만, 정작 이 술이 어떤 시간과 어떤 사람들의 삶 속에서 만들어졌는지를 차분히 되짚는 일은 많지 않다. 막걸리는 특정한 왕이나 명인, 혹은 기록으로 시작된 술이 아니다. 그것은 이름 없이 존재했고, 설명되지 않은 채 이어졌으며, 언제나 ‘그냥 마시던 술’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막걸리는 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층위를 비춘다. 이 술의 역사는 곧 한국인의 노동, 공동체, 계급, 그리고 근대화의 그늘까지 함께 품고 있다.
이름 없는 술의 시작 ― 막걸리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막걸리의 기원을 정확한 연대나 사건으로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이 술이 ‘발명’된 것이 아니라 ‘발생’했기 때문이다. 벼농사가 정착된 이후, 남는 곡물을 저장하고 활용하는 과정에서 발효는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밥이 남으면 쉬었고, 쉰 밥은 시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알코올이 생겼다. 누룩은 발명품이라기보다 경험의 축적이었다. 곡물과 미생물이 만나 만들어내는 변화는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체득된 지식이었다.
이 초기의 술은 맑지 않았다. 여과라는 개념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고, 술은 시각적 완성도보다 기능에 가까웠다. 갈증을 해소하고, 허기를 달래며, 몸을 데우는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술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술 문화’와는 다르다. 취하기 위한 목적보다 살아가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막걸리는 처음부터 음주를 전제로 한 기호품이 아니라, 농경 생활의 부산물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술은 제사와 연결되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는 늘 노동의 시간이 있었다. 공동체는 수확을 마친 뒤 음복이라는 형식으로 술을 나눴고, 그 술은 귀한 맑은 술이 아니라 탁한 술이었다. 막걸리는 이렇게 제의와 노동의 경계에서, 특별함과 일상의 사이에서 자리를 잡았다. 기록이 적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막걸리는 역사에 남기기 위한 술이 아니었다.
술의 계급화 ― 맑은 술과 탁한 술 사이에서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술은 점차 분화된다. 정제 기술이 발달하고, 의례와 제도가 체계화되면서 술은 계급을 드러내는 상징이 되었다. 맑은 술은 위로 올라가고, 탁한 술은 아래에 남았다. 청주와 약주는 제사와 연회, 관료와 양반의 자리에서 사용되었고, 막걸리는 농민과 서민의 몫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막걸리는 선택된 술이 아니라 남겨진 술이 된다. 정제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탁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이유로 막걸리는 ‘격이 낮은 술’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이 분류는 곧 기능적 분화이기도 했다. 농민에게는 빠르게 만들 수 있고, 양이 많으며, 도수가 낮은 술이 필요했다. 노동의 리듬을 깨지 않으면서도 피로를 풀 수 있는 술, 공동체 안에서 돌려 마실 수 있는 술이 막걸리였다.
조선의 유교적 질서는 음주를 경계했지만, 농번기 노동 이후의 막걸리 한 사발은 묵인되었다. 이는 막걸리가 방종의 상징이 아니라 생존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술을 금하는 도덕과 술을 허용하는 현실 사이에서, 막걸리는 언제나 현실의 편에 있었다. 이 술은 제도의 바깥에서 살아남았고, 그만큼 제도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

밥과 술의 경계 ― 농촌에서 막걸리가 수행했던 역할
조선 후기 농촌 사회에서 막걸리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었다. 그것은 술이자 식사였고, 휴식이자 노동의 연장이었다. 농사일이 길어질수록 막걸리의 역할은 커졌다. 물보다 위생적이었고, 밥보다 빠르게 에너지를 공급했다. 발효 과정에서 생성된 영양분은 허기를 달래는 데 효과적이었다.
“막걸리 한 사발”이라는 표현은 양을 의미하는 동시에 방식을 의미한다. 잔이 아닌 사발은 개인의 몫이 아니라 공동체의 도구였다. 두레나 품앗이 같은 협업 노동에서 막걸리는 돌려 마시는 술이었다. 이 술을 나누는 행위는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같은 리듬으로 일하고 있다는 확인이었다. 막걸리는 개인을 취하게 만드는 술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시키는 매개였다.

이 과정에서 막걸리는 늘 열려 있었다. 누구든 마실 수 있었고, 특별한 자격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이 막걸리를 서민의 술로 만든 가장 중요한 이유다. 이 술은 배제되지 않았고, 소유되지 않았다. 누구의 것도 아니었기에, 모두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 살아남았지만 변질된 술
막걸리의 역사에서 가장 큰 단절은 일제강점기였다. 주세령을 통해 가정 양조가 금지되고, 술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이로 인해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가양주 문화는 급격히 붕괴된다. 막걸리는 더 이상 집집마다 다른 맛을 지닌 술이 아니라, 허가받은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이 된다.

이 변화는 막걸리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생활의 일부였던 술은 세금의 대상이 되었고, 다양성은 획일화로 대체되었다. 해방 이후와 산업화 과정에서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쌀 부족으로 인해 쌀 막걸리가 금지되면서, 밀과 옥수수를 원료로 한 막걸리가 등장했다. 이는 막걸리를 더 싸고, 더 투박한 술로 만들었다.
이 시기 막걸리는 ‘서민의 술’이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하지만, 동시에 존중받지 못하는 술이 된다. 값싸고 쉽게 취하는 술, 노동자 아버지의 술이라는 인식은 막걸리를 과거의 유물처럼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가장 많은 사람들이 마셨고, 여전히 일상의 술로 남았다.
다시 선택되는 술 ― 막걸리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것
21세기에 들어서며 막걸리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전통주에 대한 재평가, 지역 양조장의 부활, 그리고 ‘서민의 술’이라는 이미지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변화의 의미는 단순히 막걸리가 세련되어졌다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다시 이 술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막걸리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은 술이다. 맑지 않고, 표준화되기 어렵고, 보관도 까다롭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이 이 술의 정체성이다. 막걸리는 권력의 술이 아니었고, 규범의 술도 아니었다. 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삶과 함께해 온 술이었다.
〈한국의 술〉 연재의 첫 편으로 막걸리를 선택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 술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술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막걸리는 단순한 전통주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어떻게 먹고, 일하고, 나누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기록이다.
막걸리는 여전히 탁하다. 그러나 그 탁함 속에는 수백 년의 시간이 가라앉아 있다.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낮은 곳에 있었던 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끝내 사라지지 않은 술. 막걸리는 그렇게, 지금도 한국인의 삶 가장 가까운 곳에서 조용히 발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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