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말, 미국 사회는 깊은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두 차례의 오일 쇼크가 불러온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과 이란 인질 사태 등은 초강대국 미국의 위상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1980년, ‘강한 미국’을 약속한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의 경제 철학인 ‘레이거노믹스’는 명확했다.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규제를 철폐하며, 자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이념의 파도 앞에서, 수십 년간 정부의 보조금이라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연명해 온 미국 상선 조선업은 최우선적인 수술 대상이 되었다. 1980년대는 미국 조선업이 서서히 가라앉던 시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정책적 결정으로 인해 순식간에 심연으로 추락해버린, 가장 잔인하고 극적인 붕괴의 시대였다.
레이건 행정부의 등장과 보조금 폐지라는 ‘결정적 한 방’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현대의 위기 속에서 정부는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 그 자체입니다”라고 선언했다. 이 한 문장은 향후 미국 산업 정책의 방향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팀에게 ‘건조차액보조금(CDS)’은 자유 시장 원칙을 왜곡하는 대표적인 ‘나쁜 정책’으로 비쳤다. 그들의 논리는 명쾌했다. 정부가 특정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비효율적인 기업을 인위적으로 살려두는 ‘기업 복지(Corporate Welfare)’에 다름 아니며, 이는 결국 납세자의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보조금이라는 보호막이 조선소들의 혁신과 생산성 향상 노력을 가로막고, 강력한 노조의 비현실적인 요구를 들어주는 명분으로 작용하여 고비용 구조를 고착화시켰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 아래, 1981년 레이건 행정부는 의회와의 최소한의 논의만을 거친 채, 미국 조선업의 생명줄과도 같았던 건조차액보조금 제도를 전격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폐지했다. 이는 점진적인 축소가 아닌, 하루아침에 지원을 ‘제로(0)’로 만드는 충격적인 조치였다. 조선업계는 이 결정이 가져올 파멸적인 결과를 경고하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작은 정부’를 향한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당시 미국 조선업계는 이미 정부 지원 없이는 단 한 척의 상선도 수주할 수 없을 정도로 허약한 상태였다. 해외 경쟁국인 일본과 유럽, 그리고 막 떠오르던 한국의 조선소들은 여전히 막대한 정부 지원을 받으며 가격 경쟁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려진 보조금 폐지 결정은, 무장도 하지 않은 선수를 갑자기 무한 경쟁의 링 위로 밀어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 상선 조선업의 숨통을 끊어놓은 이 ‘결정적 한 방’은 그렇게, 너무나도 빠르고 단호하게 실행되었다.
경쟁력 ‘제로’, 무너지는 조선소와 사라지는 일자리
보조금이라는 안전망이 사라지자, 미국 조선업이 마주한 현실은 참혹했다. 그동안 정부 지원금으로 가려져 있던 엄청난 가격 격차가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시 미국 조선소에서 건조하는 상선의 가격은 비슷한 사양의 일본이나 한국 건조 선박보다 적게는 2배에서 많게는 4~5배까지 비쌌다. 높은 인건비, 낡은 시설,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이 누적된 결과였다. 이제 그 차액을 메워줄 정부는 없었다. 당연하게도, 단 한 곳의 미국 선사도 자국 조선소에 상선을 발주하지 않았다. 국제 상선 시장에서의 신규 수주 계약은 그야말로 ‘0’으로 수렴했다.
결과는 즉각적이고 파괴적이었다. 상선 건조 물량이 완전히 끊기자, 그동안 상선과 군함 건조를 병행하던 조선소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대표적인 조선소였던 ‘선 조선해양(Sun Shipbuilding & Drydock Co.)’은 1982년 신규 건조 사업을 완전히 중단했고, 한때 미국 최대의 민간 조선소 중 하나였던 메릴랜드의 ‘베들레헴 스틸 스패로스 포인트 조선소(Bethlehem Steel’s Sparrows Point Shipyard)’ 역시 상선 부문을 폐쇄하고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서부 해안을 대표하던 ‘토드 조선소(Todd Shipyards)’를 비롯한 수많은 중소 조선소들이 파산하거나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필라델피아, 볼티모어, 샌프란시스코 등 한때 조선업으로 번성했던 항구 도시들은 문 닫은 조선소의 녹슨 크레인과 함께 활기를 잃어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숙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미국 노동통계국에 따르면, 1980년대에만 조선 및 수리업 부문에서 약 4만 개에 달하는 일자리가 증발했다. 이는 단순히 4만 명의 실업자를 넘어, 수십 년간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가 한순간에 공중으로 흩어졌음을 의미했다.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던 용접 기술과 선체 설계의 경험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고, 한 세대에 걸쳐 형성된 산업 생태계 전체가 뿌리부터 흔들렸다. 보조금 폐지라는 단 하나의 정책은 불과 몇 년 만에 미국에서 ‘상업용 선박 건조’라는 산업 분야 자체를 사실상 소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미 해군이라는 유일한 동아줄과 군수산업화의 고착
상선 시장이라는 거대한 바다가 완전히 말라버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 조선업계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미 국방부, 그중에서도 미 해군이었다. 역설적이게도, 레이건 행정부는 상선 건조 보조금은 ‘낭비’로 규정하며 폐지했지만, 소련과의 군비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600척 함대 건설’을 목표로 국방 예산을 천문학적인 규모로 증액했다. 상업 부문을 향한 문은 굳게 닫혔지만, 군수 부문을 향한 문은 활짝 열린 것이다.
이러한 정책적 방향은 살아남은 대형 조선소들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버지니아의 ‘뉴포트 뉴스 조선소(Newport News Shipbuilding)’와 코네티컷의 ‘제너럴 다이내믹스 일렉트RIC 보트(General Dynamics Electric Boat)’ 같은 회사들은 항공모함과 핵잠수함 건조에 더욱 특화하며 군수 부문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이지스 구축함과 순양함 등을 건조하는 ‘배스 철공소(Bath Iron Works)’나 ‘잉걸스 조선소(Ingalls Shipbuilding)’ 역시 미 해군의 발주 물량을 따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 조선업은 본격적인 과점 체제로 재편되었고, 이들 소수의 대형 조선소들은 미 해군이라는 단일 고객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를 고착화시켰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조선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상선 건조는 ‘원가 절감’과 ‘생산 속도’가 핵심 경쟁력이지만, 첨단 군함 건조는 ‘최고의 성능’과 ‘보안’이 최우선 가치다. 따라서 조선소들은 더 이상 국제 시장의 상업적 논리에 따라 움직일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미 국방부의 복잡하고 엄격한 요구사항(Mil-Spec)을 충족시키는 데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산 비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상선 건조에 필요한 기술과 노하우는 점차 잊혀 갔다. 1980년대는 미국 조선업이 사망한 시대가 아니라, ‘상선 조선업’이 사망하고, 오직 군함만을 위한 고도로 전문화된 ‘방위산업’으로 재탄생한 시대였다. 이 근본적인 변신은 이후 수십 년간 미국 조선업이 국제 무대에서 완전히 고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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