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14일, 미국 전역 2,100여 개 도시에서 동시에 벌어진 ‘No Kings’ 시위는 단순한 정치적 반대 운동을 넘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을 되짚는 상징적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No Kings, No Crowns, No Thrones(왕도, 왕관도, 왕좌도 없다)”라는 슬로건 아래 거리로 나선 수백만 시민들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행태에 맞서 ‘왕 없는 공화국’이라는 미국의 건국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고 외쳤다.

이날 시위는 미국 독립기념일을 3주 앞둔 시점에 전개됐으며, 정치적 갈등을 넘어 헌정주의, 권력 분산, 시민 주권 등 근본적인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전면적 성찰의 장으로 기능했다. 특히 뉴욕시 브라이언트파크를 출발해 5번가와 매디슨 스퀘어파크까지 이어진 시위 행렬은 수만 명이 참여하며 가장 큰 규모를 기록했다. 뉴저지에서는 뉴어크, 저지시티, 모리스타운, 애서배리파크 등지에서 동시다발적 시위가 벌어졌으며, 시민들과 정치인, 종교인, 예술가, 학생들이 고루 참여했다.
‘No Kings’라는 문구는 오늘날의 정치적 위기 속에서 미국 건국 초기의 반군주주의(Anti-monarchism) 정신을 소환한다. 1776년, 식민지 개척민들은 조지 3세 국왕의 전제 통치에 맞서 “우리는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이때의 열망은 곧 헌법 제정과 함께 권력의 분산,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 시민의 투표권 보장이라는 체제로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장치는 바로 군주제의 부활을 방지하기 위한 헌정적 설계였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2025년 1월 취임)는 이같은 설계를 다시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그는 취임 직후부터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 개최, 법원 판결 거부, 행정명령 폭주, 이민자 무차별 추방 강화, 언론에 대한 공격적 발언 등으로 행정부 권한을 극단적으로 확대해왔다. 특히 그가 주최한 생일 행사에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동원되고, 의회 승인 없이 국경 장벽 건설 예산이 집행되는 모습은 일부 시민들에게 트럼프가 ‘대통령’이 아니라 ‘왕’처럼 군림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뉴욕시에서 열린 시위의 한 참가자는 “우리는 트럼프 한 사람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왕처럼 군림하는 상황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손에 ‘In America, We Don’t Do Kings’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또 다른 참가자는 “이 시위는 민주주의에 대한 회복 선언이며, 시민의 권리가 제도 위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뉴저지에서는 뉴어크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시위에 라스 바라카 뉴어크 시장과 코리 북커 연방 상원의원이 함께 참여해 지지를 표했다. 이들은 “이 나라는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시민들이 공공영역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저지시티에서는 아시아계 이민자 단체들이 중심이 된 퍼레이드가 열려, “시민은 침묵하지 않는다”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이번 시위는 특정 정당이나 이념적 경계를 넘어서 다양한 계층과 세대가 함께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진보 성향의 단체뿐 아니라, 헌법주의를 중시하는 보수 유권자들 또한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트럼프의 포퓰리즘이 ‘보수주의의 가치를 왜곡’하고 있다며, 공화당 내부의 자성도 촉구했다. 특히 트럼프의 강경 이민 정책에 반대한 일부 백인 농민 단체와 청년 보수 성향 시민들도 눈에 띄었다.
정치학자들은 이번 ‘No Kings’ 시위를 1960년대 시민권 운동이나 2017년의 여성 행진(Women’s March)에 비견하며, 미국 민주주의의 복원력(resilience)이 다시금 확인된 순간으로 평가하고 있다. 특히 시위가 디지털 공간과 거리에서 동시에 조직되며, 온라인 캠페인과 지역 커뮤니티의 연대가 결합된 새로운 유형의 ‘디지털 공화주의적 시민성’이 나타났다는 점도 주목된다. 이는 미국 내 권력 감시와 시민 감수성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일부 지역에서는 충돌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경찰과 시위대 간의 마찰이 벌어졌고, 유타에서는 시위 중 총격 사건이 발생해 수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평화적인 시위가 중심이 되었으며, 뉴욕과 뉴저지의 시위 현장에서도 큰 충돌 없이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경찰 측은 시민들의 협조와 조직위원회의 조율 덕분에 사전에 계획된 행진 경로가 안전하게 유지되었다고 평가했다.
이번 시위를 통해 시민사회는 단순한 정치적 반대가 아닌, 제도 그 자체에 대한 참여의 권리를 주장했다. 시위대는 트럼프 대통령의 퇴진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통령제가 왕정화되지 않도록” 헌법의 원칙이 다시 자리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뉴욕대 정치철학 교수 엘리자베스 레빈은 “이번 시위는 미국 공화주의 정치의 방어적 본능이 발동한 것”이라며, “시민이 권력을 되찾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목격하게 된 역사적 순간”이라고 분석했다.

‘No Kings’ 시위의 가장 큰 의미는, 그것이 트럼프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구조적·제도적 저항이라는 데 있다. 이는 대통령제라는 제도가 가진 고유의 위험성 — 즉 권력이 집중되고, 그것이 견제되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시민의 집단적 경고다. 이러한 경고는 단지 오늘의 미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향후 어떤 지도자가 집권하든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민주주의의 근본 명제이기도 하다.
건국 250주년을 앞둔 미국은 지금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다. ‘왕 없는 공화국’이라는 건국 당시의 이상은 여전히 유효한가? 시민의 권리는 제도 위에 있는가, 아니면 지도자의 의지 아래 종속되는가? 이번 ‘No Kings’ 시위는 그 물음에 대해 수백만 시민이 한목소리로 외친 응답이었다. “우리는 왕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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