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도쿄만 요코스카 항에 정박한 미주리함 갑판 위에서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미합중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 힘의 원천은 단지 원자폭탄이나 막강한 육군에만 있지 않았다. 대서양과 태평양을 가로질러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른 수천 척의 상선, ‘자유의 함대(Fleet of Freedom)’라 불린 거대한 해상 수송 능력이야말로 연합국을 승리로 이끈 숨은 동력이었다. 이 함대를 건조한 미국 조선업은 당시 세계 산업계의 경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역사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가장 높은 곳에서 시작되는 법. 2차 세계대전의 승리와 함께 맞이한 영광의 정점에서, 미국 조선업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힘의 이면에 가려진 구조적 모순과 다가올 위기의 전조를 품고 있던, 폭풍전야와도 같은 시대였다.

전시(戰時) 생산의 기적, 리버티선과 산업의 유산
미국 조선업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이름을 꼽으라면 단연 ‘리버티선(Liberty Ship)’일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사적 위기 속에서 탄생한 이 투박하지만 견고한 표준 화물선은 미국 산업 능력의 총체이자, 현대 제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혁신의 아이콘이었다. 전쟁 이전, 선박 한 척을 건조하는 데는 수개월에서 1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선체 구조를 리벳으로 일일이 연결하고, 모든 공정을 하나의 건선거(Dry dock) 안에서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방식은 복잡하고 더뎠다. 그러나 독일 유보트의 무차별 공격으로 대서양 수송로가 마비될 위기에 처하자, 미국은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새로운 생산 방식을 고안해냈다.

그 핵심은 ‘조립 라인(Assembly Line)’ 방식과 ‘용접(Welding)’ 기술의 전면적인 도입이었다. 자동차 산업에서 증명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처럼, 선체를 여러 개의 모듈(Module)로 나누어 각기 다른 작업장에서 동시에 제작한 뒤, 이를 최종적으로 건선거에서 거대한 블록처럼 조립하는 혁신적인 공법이 채택되었다. 리벳 접합 대신 도입된 용접 기술은 건조 속도를 획기적으로 단축시켰을 뿐만 아니라, 선체의 무게를 줄여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게 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과 흑인 등 이전에는 조선소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노동력이 대거 투입되며 거대한 산업 예비군을 형성했다.
그 결과는 경이로웠다. 첫 리버티선인 ‘SS 패트릭 헨리’호의 건조 기간은 244일에 달했지만, 공정이 최적화되면서 평균 건조 기간은 42일로 단축되었고, ‘SS 로버트 E. 피어리’호는 단 4일 15시간 29분 만에 진수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 전역 18개 조선소에서 2,700척이 넘는 리버티선과 그 후속 모델인 빅토리선(Victory Ship)이 마치 공장에서 자동차를 찍어내듯 쏟아져 나왔다. 이는 미국 조선업이 남긴 위대한 유산이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선 인프라, 가장 숙련된 노동력, 그리고 가장 진보된 생산 기술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 압도적인 산업 기반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미국의 힘처럼 보였고, 평화의 시대가 오면 이 역량이 상선 시장을 완전히 지배할 것이라는 낙관론이 팽배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유산은 곧 처리 곤란한 거대한 짐이 되어 돌아오기 시작했다.
승리의 역설, 잉여 선박과 경쟁국의 부활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 앞에는 약 5,500척에 달하는 잉여 선박이 남았다. 이는 전 세계 상선 총 톤수의 절반을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평시 경제 체제로 복귀하면서 이 거대한 선단은 즉각적인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국내 해운사들이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숫자였고, 이를 방치할 경우 운임 폭락을 유발하여 해운 시장 전체를 교란할 수 있었다. 여기서 미국 정부는 자국 조선업의 미래보다는,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이라는 더 큰 그림을 우선하는 전략적 선택을 내린다.
1946년 제정된 ‘상선 매각법(Merchant Ship Sales Act)’은 이러한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이 법에 따라 미 정부는 전시 표준선을 포함한 잉여 선박들을 국내외 민간 선사에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매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고 서방 세계의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마셜 플랜’의 일환으로,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 전쟁으로 해운 기반이 파괴된 유럽 동맹국들과, 새로운 아시아의 동맹으로 편입된 일본에 대규모로 선박이 넘어갔다. 이는 동맹국들의 해운 및 무역 활동을 정상화시키는 데는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미국 조선업계에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당장 쓸 수 있는 값싼 중고 선박이 시장에 대량으로 풀리면서, 비싼 돈을 주고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려는 수요가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이다.
동시에, 미국의 원조와 기술 이전을 통해 경쟁국들의 조선 산업이 무서운 속도로 부활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과 독일은 전쟁으로 파괴된 낡은 조선소 대신, 미국의 최신 생산 기술과 공법을 도입한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며 빠르게 경쟁력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미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인건비를 무기로, 미국 조선소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했다. 1956년, 일본은 마침내 영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선박 건조 국가로 등극했다. 반면, 전쟁의 상처를 입지 않았던 미국의 조선소들은 역설적으로 낡은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고, 높은 임금 수준과 강력한 노조는 가격 경쟁력을 더욱 악화시켰다. 결국 미국 조선업은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던 수출 산업에서, 점차 미 해군의 발주 물량과 자국 시장에만 의존하는 내수 산업으로 그 위상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승리의 대가로 얻은 압도적인 선단이 오히려 자국 산업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린 것이다.
‘건조차액보조금(CDS)’, 달콤했지만 위험했던 인공호흡기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 미국 상선 조선업은 자력으로는 더 이상 해외 경쟁자들과 맞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조선소에서 1,000만 달러에 건조할 수 있는 선박이 미국에서는 2,000만 달러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선사들이 굳이 비싼 자국 선박을 발주할 이유는 없었다. 국가 안보의 근간이 되는 조선업의 붕괴를 막기 위해, 미국 정부는 ‘건조차액보조금(Construction Differential Subsidy, CDS)’이라는 강력한 지원책을 꺼내 들었다.
1936년 상선해운법에 그 뿌리를 둔 이 제도는, 미국 선사가 미국 조선소에 국제 항해용 선박을 발주할 경우, 해외 최저가와의 차액 일부를 정부가 직접 보조해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1,000만 달러에 지을 수 있는 배를 미국에서 1,800만 달러에 짓는다면, 그 차액 800만 달러의 상당 부분을 정부가 대신 내주는 것이다. 특히 1970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서명한 상선해운법 개정안은 보조금 지급 상한선을 높이고 지원 대상을 확대하며, 10년간 300척의 상선을 건조한다는 야심 찬 목표를 제시했다. 이 강력한 정책 덕분에 미국 조선업은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1970년대 동안 미국 조선소들은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초대형 유조선(VLCC) 등 고부가가치 선박들을 포함해 연간 15~25척의 상선을 꾸준히 건조하며 평화 시기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이 보조금은 산업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정부 지원이라는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게 되면서, 미국 조선소들은 생산성을 높이고 원가를 절감해야 할 절박한 동기를 상실했다. 정부가 가격 차이를 메워주니, 굳이 힘든 구조조정이나 기술 혁신에 나설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력한 노조는 높은 임금 수준을 유지했고, 비효율적인 생산 방식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 시기 미국 조선업은 겉으로는 호황을 누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정부 지원 없이는 단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허약한 체질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달콤했지만 위험했던 보조금은 결국 1980년대에 닥쳐올 거대한 파도 앞에서 미국 조선업을 지켜줄 방파제가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충격에 취약하게 만드는 모래성이었음이 증명된다. 영광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고, 이제 막 시작될 본격적인 붕괴의 시대를 향해 미국 조선업은 위태로운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2부에서 계속)
ⓒ 뉴욕앤뉴저지.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