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니치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대개 뉴욕 맨해튼을 오가며 잠시 들르는 부촌 교외나 요트 선착장이 있는 고급 주거지로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오래된 자연의 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과 과학을 품어온 공간이 숨어 있다. 바로 브루스 뮤지엄(Bruce Museum)이다. 작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 박물관은 단순히 ‘전시를 보는 곳’이 아니다. 여기서는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해안의 향기와 숲속의 고요함이 교차하고, 예술과 과학이 서로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그리니치를 대표하는 이 뮤지엄은 최근 대대적인 확장을 통해 지역사회와 방문객에게 새로운 문화적 감흥을 선사하며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저택에서 박물관으로, 100년을 넘어온 유산
브루스 뮤지엄의 시작은 다소 우연에 가까웠다. 원래 이 건물은 1853년 변호사 프랜시스 호크스의 저택으로 지어졌다. 세컨드 엠파이어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지붕선과 외관은 당시 뉴잉글랜드 교외 저택의 우아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후 이 공간은 1908년, 섬유 산업으로 부를 쌓은 로버트 모펫 브루스(Robert Moffat Bruce)의 손에 의해 지역사회에 기증된다. 그는 이 저택이 단순히 개인의 사유 공간이 아니라, 예술과 자연을 함께 나누는 공공의 장이 되길 바랐다.

1912년 첫 공식 전시가 열리면서, 브루스 뮤지엄은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다른 박물관들이 주로 한 가지 성격, 예를 들어 순수 미술이나 자연사만을 다루는 것과 달리, 이곳은 광물과 화석, 동물 표본과 회화, 그리고 현대미술까지 아우른다. 그런 의미에서 브루스 뮤지엄은 ‘백화점식 박물관’이라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나열이 아니라, 자연과 예술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탐구하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건축, 새로운 정체성
2023년 완공된 리노베이션은 박물관의 위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설계를 맡은 EskewDumezRipple은 기존 3만여 제곱피트 규모의 건물에 4만 제곱피트를 추가해, 총 7만 4천 제곱피트에 달하는 대형 박물관으로 재탄생시켰다.

무엇보다 달라진 것은 ‘동선’이다. 과거 박물관의 입구는 도로변에 치우쳐 있어 방문객이 단순히 건물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녹음이 짙은 브루스 파크(Bruce Park)를 향해 열려 있다. 관람객은 공원을 거닐듯이 입구에 들어서고, 자연스럽게 건축과 자연이 맞닿는 지점에서 경험을 시작한다. 입구 로비는 천장이 높고 개방적이며, 유리와 석재가 어우러져 ‘투명하면서도 견고한’ 분위기를 만든다. 마치 바닷가의 빛과 바위의 질감을 동시에 품은 듯하다.
또한 강당, 교육관, 새로운 갤러리들이 더해지며 박물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을 넘어 ‘문화 허브’로 기능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다. 아이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공간, 지역 주민이 강연을 들을 수 있는 공간, 예술가들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무대가 모두 여기에서 가능하다.

전시, 예술과 과학의 경계 허물기
브루스 뮤지엄의 가장 큰 매력은 전시 주제의 폭이다. 최근 리노베이션 후 선보인 첫 대형 특별전은 ‘펭귄’이었다. 펭귄이라 하면 귀엽고 친근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박물관은 이를 단순히 ‘동물 소개’로 끝내지 않았다. 2,700만 년 전 멸종한 거대한 카이루쿠 펭귄 화석부터, 오늘날 뉴질랜드 해안에서 서식하는 작은 푸른 펭귄에 이르기까지, 진화와 환경 변화의 거대한 맥락 속에서 펭귄을 조명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 역시 ‘펭귄을 통해 본 지구 생태계의 변동사’라는 관점을 배우게 된다.

상설 전시도 흥미롭다. 반짝이는 광물 전시는 과학적 설명과 미학적 체험이 교차하는 자리다. 로버트 R. 위너가 기증한 200여 점의 희귀 광물은 단순한 표본을 넘어, 빛과 색, 형태를 통해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또한 고생물 화석, 지역 원주민 유물, 동식물 디오라마는 뉴잉글랜드의 자연과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 박물관은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술관에서 열리는 회화와 조각 전시 옆으로, 과학관에서는 기후 변화나 해양 생태계를 다루는 전시가 이어진다. 한쪽에서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다가, 다른 쪽에서는 빙하가 녹는 과정을 보여주는 디오라마를 마주하는 경험은 브루스 뮤지엄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지역 사회와 함께하는 박물관
브루스 뮤지엄은 단순한 관광 명소가 아니다. 이곳은 철저히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간’이다. 어린이를 위한 이동형 전시 차량 ‘브루스모바일(Brucemobile)’은 학교와 커뮤니티를 찾아가 자연과 과학을 가르치며, 주말 프로그램과 가족 워크숍은 그리니치 주민들의 삶 속에 스며든다.

교육관에서는 학생들이 화석을 직접 만져보거나, 현미경으로 곤충을 관찰하며, 예술 수업을 통해 창의력을 기른다. 이는 단순한 박물관 방문이 아니라, 배움과 놀이가 결합된 ‘삶의 일부’가 된다. 이런 점에서 브루스 뮤지엄은 대도시의 거대 미술관이 제공하지 못하는 ‘가까움’과 ‘친밀감’을 준다.
지역 주민들에게 이곳은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하다. 작은 규모의 도시가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곧 ‘문화적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특히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이른바 ‘커뮤터 타운(commuter town)’으로만 인식되던 그리니치가, 이제는 독자적인 문화 브랜드를 갖게 된 셈이다.
여행자의 시선에서 본 브루스 뮤지엄
만약 뉴욕을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맨해튼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 브루스 뮤지엄에 들러보길 권한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나 MoMA처럼 화려하고 방대한 규모는 아니지만, 이곳은 오히려 그 ‘적당한 크기’ 덕분에 부담 없이 예술과 과학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갤러리를 한 바퀴 돌고 나면, 바로 앞에 펼쳐진 브루스 파크의 나무 그늘 아래서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바닷바람과 숲 냄새가 뒤섞이는 순간, 박물관의 경험은 단순한 ‘관람’을 넘어 ‘삶의 한 장면’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는 길, 거대한 도시의 박물관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어떤 ‘따뜻함’이 마음에 남는다.
작은 언덕 위의 거대한 울림
브루스 뮤지엄은 단순히 전시물의 집합체가 아니다. 그것은 ‘경험의 축적’이며, ‘지역과 세계를 잇는 다리’다. 저택에서 시작해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공간은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며 살아 있다.

뉴욕의 빛나는 문화 시설들 사이에서 브루스 뮤지엄은 어쩌면 작고 조용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예술과 과학, 자연과 인간,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이 박물관은, 지금도 언덕 위에서 경쾌한 바람처럼 사람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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