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o the B] 캔 한 통에 140년—역사로 읽는 델몬트의 생존법

호텔 커피 라벨에서 전국 브랜드로

‘델몬트(Del Monte)’의 시작은 통조림이 아니라 커피였다. 1880년대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의 명문 리조트 ‘호텔 델 몬테’ 전용 블렌드에 붙은 라벨이 ‘Del Monte’였고, 곧 서부 캘리포니아의 통조림 산업이 이 이름을 프리미엄 표지로 채택하면서 브랜드의 성격이 정해졌다. 1899년 서부 18개 캔닝 회사가 모여 캘리포니아 과일 통조림 협회(CFCA)를 세웠고, 1916년에는 대형 합병으로 ‘캘리포니아 패킹 코퍼레이션(Calpak)’이 탄생했다. 이 시기 ‘Del Monte’는 기업 수준의 통합 라벨이 되어 과일·채소·파인애플 등 주력 품목을 하나의 표준 품질 아래 묶었다.
1967년 사명을 아예 Del Monte Corporation으로 바꾸며 브랜드와 회사 이름이 일치했고, 서부 농업지대—철도—항만—동부 유통망이 연결된 거대한 사슬 안에서 ‘계절을 넘어서는’ 동일 품질의 캔푸드가 전국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동부 확장의 상징으로 1948년 뉴저지 스웨즈보로의 토마토 강자 허프(Hurff)를 인수한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지역 농산물이 공장을 거쳐 ‘Del Monte’ 라벨로 바뀌어 돌아오는 순환이 이때 굳어졌다.

[출처: 뉴욕앤 뉴저지, DB 금지]

표준화가 만든 식탁의 혁명

델몬트가 바꾼 것은 공장 몇 곳의 생산량이 아니라, ‘먹는 방식’ 자체였다. 원료 산지와 가공, 동·서부 물류를 유기적으로 묶은 운영 모델은 계절·지역·작황 변동을 희석하고, 가정이 언제든 일정한 맛과 식감을 기대하도록 만들었다. 2차대전기에는 군수 보급을 통해 캔푸드의 저장성·안전성이 국가적 신뢰 자산이 되었고, 전후에는 가정의 일상표준으로 안착했다. ‘과일 칵테일’ 같은 조합 레시피는 파티 디저트에서 도시락 과일까지 생활문화의 문법을 바꿨다.
라벨은 정보의 언어가 되었다. 1970년대 초, 델몬트는 미국 대형 식품회사 가운데 앞서 영양성분을 자발적으로 표기했다. 소비자는 칼로리·당·나트륨을 ‘읽고’ 선택하기 시작했고, 브랜드 신뢰는 품질을 넘어 투명성의 문제로 확장됐다. ‘읽을 수 있는 식품’이라는 오늘의 상식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라벨, 다른 길—Fresh와 Foods의 분기

[출처:Sean Foster]

1980~90년대 미국 식품 대기업의 인수·분할 물결 속에서 델몬트는 역사적 분기점을 맞는다. 대형 거래를 거치며 신선 농산물을 다루는 Fresh Del Monte Produce와 가공식품을 담당하는 Del Monte Foods가 완전히 다른 회사로 갈라진 것이다. 소비자目에는 같은 ‘Del Monte’지만, 소유·재무·경영은 별개가 되었고 라벨은 라이선스 체계로 공존한다.
이 구분은 오늘의 사건을 이해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2025년 여름, 파산보호(챕터 11)를 신청한 주체는 통조림·브로스·소스·음료 등 가공 부문의 Del Monte Foods다. 회사는 영업을 멈추지 않기 위해 약 9억 달러대의 DIP(채무자 보유) 자금 약정을 마련했고, 법원 감독 아래 자산 매각(섹션 363) 절차를 밟고 있다. 반면 Fresh Del Monte Produce는 신선 농산물 중심의 별개 상장사로, 이번 절차의 당사자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갈림길은 델몬트라는 이름이 하나의 ‘거대 우산’이 아니라 카테고리별 전략과 자본 구조를 달리하는 복수의 세계가 되었음을 뜻한다. 같은 라벨이 서로 다른 시장의 리듬—신선과 가공, 농업과 제조, 산지와 공장—을 동시에 살아낸 셈이다.

역사로 읽는 파산보호와 다음 장

델몬트의 챕터 11은 문을 닫는 종지가 아니라, 140년의 문장을 다음 시제로 바꾸는 문장부호에 가깝다. 역사에서 단서는 이미 주어져 있다. 첫째, 델몬트는 위기 때마다 포맷을 바꿔 표준을 갱신했다. 캔에서 컵·파우치로, 시럽에서 무가당·저당으로, 원물 중심에서 브로스·편의식·RTD 음료로—품목과 용기의 언어를 시대에 맞게 번역해 왔다. 둘째, 라벨은 늘 신뢰의 기술이었다. 영양표시로 시작된 ‘읽을 수 있는 식품’의 유산은 오늘도 선택의 기준이 된다. 셋째, 공급망은 델몬트의 진짜 자산이다. 산지—공장—물류—유통의 긴 사슬을 다루는 경험은, 새 주인이든 채권단이든 ‘재구성’의 설계도를 그릴 때 가장 먼저 확인할 토대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대체로 세 갈래로 압축된다. 채권단 주도의 인수로 부채를 걷어내고 핵심 카테고리(브로스·간편 포맷·신규 음료)에 집중하는 길, 전략적 투자자나 사모펀드가 브랜드 파이프라인과 동·서부 물류 인프라를 통째로 가져가는 길, 혹은 사업부를 나눠 파는 분할 매각의 길. 어느 쪽이든 관건은 ‘표준화의 재정의’다. 가격·영양·편의의 균형을 다시 짜고, 소비자 혼선을 줄이며(특히 Fresh와 Foods의 구분), 델몬트라는 라벨이 21세기의 식탁 언어로 무엇을 약속할지 분명히 하는 일이다.
결론적으로, 델몬트는 사라지는 브랜드가 아니라 역사로 재구성되는 브랜드다. 호텔 커피 라벨에서 출발해 미국의 식탁을 표준화했고, 라벨을 정보의 문법으로 바꿨다. 그리고 지금, 회생 절차를 통해 자본 구조를 손보며 다음 문장을 준비하고 있다. 오래된 이름이 다시 표준을 제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델몬트가 언제나 그랬듯 역사를 혁신으로 번역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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