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상반기 가장 주목받은 영화 중 하나는 단연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 17(Mickey 17)》이었다. 전작 《기생충》으로 전 세계 영화계를 흔든 봉 감독이 선택한 차기작은 한국이 아닌,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SF 블록버스터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작품이 단순한 외계 모험이나 우주 전투를 그린 영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와 정체성, 자본주의와 소모적 노동,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윤리를 묻는 철학적 SF라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특유의 블랙코미디적 감각과 사회 비판적 시선을 잃지 않은 채, 로버트 패틴슨을 앞세운 이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완성해냈다. 그 결과는 흥미로우면서도 다소 파편적인, 그러나 여전히 강렬한 울림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클론과 식민지, 그리고 정체성의 위기
《미키 17》의 배경은 2050년대,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 타 행성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는 시대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주인공 ‘미키 반스’는 극단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험한 계약을 수락하고, 우주 탐사대의 일원으로 떠난다. 그의 직업은 ‘소모품(Expendable)’이다. 이는 말 그대로 죽어도 되는 인물로,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다가 사망하면 클론으로 다시 재생된다.

하지만 어느 날, 17번째 복제에 이른 미키는 시스템의 오류로 인해 이전 버전인 ‘미키 16’과 ‘미키 17’이 동시에 살아 있게 된다. 이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은 단순한 클론 중복의 문제가 아닌, 인간 정체성과 존재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철학적 실험과 장르의 전복
《미키 17》의 가장 큰 미덕은 단순한 SF 블록버스터의 기대를 거부하고, 철학적 질문을 중심에 둔 존재론적 우화로 자신을 구성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미키는 위험한 임무를 대신 수행하고 죽으면 클론으로 재생되는 ‘소모품(Expendable)’이다. 하지만 미키 17이 생성되는 순간, 미키 16이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영화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질문으로 들어간다.
이는 단순히 복제 인간의 기술적 설정을 넘어, 동시에 존재하는 두 자아가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본질적 물음을 던진다. 복제와 재생을 반복하는 구조는 인간 생명의 본질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의 한 단면을 고발하고, 개인의 고유성과 연속성을 철저히 해체한다. 특히 미키 두 개체의 대립과 공존은 단일 자아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나는 나인가, 아니면 시스템의 일부인가’라는 실존주의적 딜레마로 이어진다.

봉 감독은 이 무거운 질문들을 블랙코미디의 형식으로 풀어낸다.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을 일상적 사건처럼 처리하고, 극단적 계급사회로 그려진 식민지 체계의 권력자들을 희화화한다. 특히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독재자 케네스는 큐브릭 영화의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풍자적 존재로, 이 사회의 부조리를 극대화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동시에, 외계 생명체인 ‘크리퍼스’와의 갈등은 인간 중심적 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반전적 시선을 던지며, 타자성의 윤리적 고려를 촉구한다.
연기와 연출: 심리적 깊이와 시각적 상상력의 결합
연기 측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로버트 패틴슨의 1인 2역 연기다. 그는 미키 16과 17을 언어적 억양, 표정, 시선의 깊이로 분리하며, 두 인물이 동일한 존재임에도 각기 다른 심리적 경험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특히 두 미키가 서로에 대한 감정—경멸, 동정, 연민, 협력—을 주고받는 과정은 극의 중심에서 가장 인간적인 긴장감을 형성한다.
봉 감독은 이러한 심리적 불안을 공간과 시청각 언어를 통해 시각화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한다. 식민 행성은 회색빛 메탈릭 톤과 폐쇄된 구조로 설계되어 미키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고, 죽음과 재생이 반복되는 장면에서는 몽타주 기법과 잔상 효과를 활용해 시간과 공간의 선형적 감각을 해체한다. 이는 마치 인간이 가진 기억과 정체성이 반복과 왜곡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됨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연출이다.

다만, 조연 캐릭터들에 대한 서사적 밀도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나오미 애키가 연기한 ‘비’는 미키의 내면에 감정적 연결고리를 제공하는 인물이지만, 그녀의 동기와 배경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스티븐 연의 캐릭터 역시 잠재력 있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기능적 수준에 머문다. 이는 미키라는 존재의 복잡성과 무게에 비해 주변 인물들이 서사적으로 얇게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사 구조 면에서는 초중반까지 빠르게 전개되던 플롯이 후반으로 갈수록 정체되는 감이 있다. 중복된 코미디와 철학적 독백이 반복되며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에너지의 축적이 약화되는 것이 그 원인이다. 이는 봉 감독 특유의 감정보다 구조 중심의 마무리 방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SF 장르의 관습적 기대치를 가진 관객에겐 다소 실망감을 줄 수 있다.
사회적 메시지와 문화적 함의
《미키 17》은 단지 클론과 식민지를 배경으로 한 상상력이 아니라, 현대 사회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내재된 문화적 은유다. 특히 ‘소모품’이라는 개념은 현대 노동시장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대체 가능한 존재로 간주되는지를 극단적으로 형상화한 표현이다. 이는 플랫폼 노동자, 비정규직, 계약직 등 현대 자본주의의 하위 계층에 대한 직접적 은유로 작용한다.

또한 외계 생명체를 지배 대상으로 보는 인간의 태도는, 과거 식민주의가 타 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하고 문명화라는 명분으로 침탈했던 역사와 겹쳐진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크리퍼스와의 갈등과 협상은 이 영화가 단순히 인간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자와의 공존 가능성을 묻는 생태적 윤리학의 시도임을 시사한다.
흥미로운 점은, 봉준호 감독이 이 모든 무거운 메시지를 ‘웃기면서’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시스템의 모순을 과장과 아이러니로 드러내는 방식이며, 관객에게 직접적인 교훈보다는 **자기 반성의 여지를 남기는 ‘탈중심적 서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다층적 메시지와 시도는 모든 관객에게 동일하게 다가가지는 않는다. 실험적 서사 구조와 장르적 규범을 거스르는 연출은 일부 대중 관객에게는 이해의 장벽과 정서적 거리감을 형성할 수 있다. 이는 이 작품이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택한 ‘모호한 지점’이라 평가할 수 있다.
결론: 질문을 남긴 영화, 시대의 거울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확고한 세계관과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갖춘 작품이다. 그러나 《기생충》이 현실 세계의 불평등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체제의 붕괴까지 드라마틱하게 그려냈다면, 《미키 17》은 그보다 훨씬 내면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존재의 해체를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결국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나는 누구인가?”
“복제된 나는 진짜 나일 수 있는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은 삶이라 할 수 있는가?”
“식민지 건설은 언제나 진보인가, 폭력인가?”
이 질문들은 단지 스크린 속 클론의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그 질문의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이다.
최종 평가 요약
- 별점: ★★★★☆ (4.3/5)
- 강점: 철학적 주제의식, 연기력, 시각적 연출, 문화적 비판
- 약점: 러닝타임, 일부 캐릭터의 피상성, 후반부 몰입도 저하
- 추천 대상: 철학적 SF, 실험적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세계관을 깊이 있게 탐색하고 싶은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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